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메이 덴노 (문단 편집) == 황위 계승 분쟁 == 7년이 지나 스이코 덴노가 붕어하기 이전인 628년 음력 3월 6일에 스이코 덴노가 두 황자를 불렀다. 한 명은 타무라 황자였고, 다른 한 명은 [[쇼토쿠 태자]]의 아들이자 [[소가노 에미시]]의 조카였던 야마시로노오오에(山背大兄) 황자[* 이 당시 쇼토쿠 태자의 가계인 상궁왕가의 대표자였다. 《[[일본서기]]》에서는 명확한 관계가 제시되어 있지 않으나, 쇼토쿠 태자에 관련된 기록인 《성덕태자전력》, 《상궁성덕태자전보궐기》와 헤이안 시대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상략기》에서는 쇼토쿠 태자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생년은 불명이나, 고교쿠 2년(643) 음력 11월 11일에 조메이 덴노의 또 다른 아들이자 소가씨의 피를 이은 후루히토노오오에(古人大兄)를 세우려고 한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의 공격을 받아 자결했다.]였다. 스이코 덴노는 두 황자에게 유언을 전했는데...문제는 이 유언 자체가 엄청나게 모호했다. >임자(6일)에 천황의 병이 심해져서 나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타무라 황자를 불러 >'''“황위에 올라 나라의 기초를 닦고 모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원래 안이하게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너는 삼가고 잘 살펴 경솔하게 말하지 말라.”''' >고 말하였다. 또 같은 날에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를 불러 '''“너는 아직 미숙하다. 마음에 바라는 것이 있어도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라. 반드시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따르도록 하라.”''' >고 타일렀다. - 《[[일본서기]]》 권 22 스이코 덴노 36년 3월 임자 조 위 내용을 보면 일방적으로 타무라 황자가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읽을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에게 전한 유언도 그가 황위 계승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스이코 덴노의 유언은 한 사람을 후보자로 확정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을 후보자로 지명한 것이기 때문에, 유언의 내용에 따라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를 놓고 군신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이때 소아하이신이 대신이었다. 그는 혼자 후계를 정하려고 하였으나, 군신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안배마려신과 상의하여, 군신들을 대신의 집에 모이게 하여 향응을 베풀었다. 연회를 끝내고 산회하려고 할 때 대신이 안배신에게 명하여 군신에게 말하도록 하였다. >"지금 천황이 붕어하시고 후사가 없다. 만일 속히 결정하지 않으면 내란이 일어날까 걱정이다. 지금 어느 왕을 후계로 해야 하는가. 천황이 와병 중일 때 타무라 황자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대임이다.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 타무라 황자여, 신중하게 생각하라 태만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에게 ‘그대는 혼자서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 반드시 군신의 말에 따라 삼가며 그릇됨이 없도록 하라.’고 명하셨다. 이것이 천황의 유언이다. 지금 누구를 천황으로 할 것인가?" >그때 군신이 침묵하여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다시 물었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물었다. 그때 대반경련이 나아가 >"천황의 유언을 따라야 합니다. 군신의 말을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고 말했다. 이에 안배신이 >"무슨 말인가. 본심을 밝혀라" >라고 말했다. 이에 (대반경련이) >"천황이 어떤 생각에서 타무라 황자에 ‘천하의 통치를 위임하는 일은 대업이다. 태만하지 말라.’고 하셨겠습니까? 이에 따르면 황위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이때 채녀신마례지, 고향신우마, 중신련미기, 난파길사신자 등 4명의 신하가 >"대반련의 말에 전혀 다른 이의는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허세신대마려, 좌백련동인, 기신염수 3인이 나아가 >"야마시로노오오에(山背大兄) 왕, 이분을 천황으로 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소아창마려신만이 혼자 >"신은 지금 당장에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생각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대신은 군신이 화합하지 못하여 일이 성사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물러났다.” -《일본서기》 권 23 조메이 덴노 즉위 전기 스이코 덴노 36년 9월 조 위 기사에서는 당시의 대신 [[소가노 에미시]]가 원래 독자적으로 후보를 선정하려 했으나, 군신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긴급히 회의를 소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황위 계승 자체는 황실 내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키나이(기내) 지역의 씨족들의 이해관계도 깊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의 후보자 중에서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는 군신들 간에 큰 화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회의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급작스러운데다 술자리가 파하고 돌아가려던 찰나에 갑자기 의견이 제시되었고, 군신들이 유조에 따라 두 후보자를 동시에 지지한 점에서 황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를 지지해야 했던 소가노 에미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스이코 덴노의 붕어 전후로 줄곧 타무라 황자를 지지했는데, 군신회의에서도 처음부터 타무라 황자를 지지하게끔 유도하려 했으나 회의에 참가한 군신이 5대 3의 비율로 두 황자를 지지하자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언틋 보면 타무라가 앞선 것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야마시로노오오에를 지지하는 의견이 있었다는 점 자체가 군신회의의 실패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결국 군신회의에서 의견 합의를 도출해 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소가노 에미시는 회의를 파했는데, 며칠 후에 회의의 결과를 전해들은 야마시로노오오에는 회의에서 타무라 황자를 지지하는 군신의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숙부인 소가노 에미시에게 사자를 보내 그의 뜻을 듣고 싶다고 전했다. >이때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은 반구궁에 있으면서 의논한 말을 전해 들었다. 그리하여 삼국왕, 앵정신화자고 두 사람을 보내 몰래 대신에게 >“전하여 듣건대, 숙부는 타무라 황자(田村皇子)를 천황으로 삼으려 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서서 생각해도, 앉아서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바라건대 분명하게 숙부의 생각을 알고 싶다.” >라고 말했다. 대신은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이 전하는 말을 듣고 혼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배신, 중신련, 기신, 하변신, 고향신, 채녀신, 대반련 등을 불러 상세히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의 말을 전했다. 이윽고 또 대부들에게 >“그대 대부들은 함께 반구궁에 가서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에게 ‘어찌 신하인 저 혼자서 후계를 결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천황의 유언을 받들어 군신에게 말할 따름입니다. 군신들은 유언과 같이 타무라 황자(田村皇子)가 마땅히 후사가 되어야 하며 다시 누가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라고 모두 말합니다. 이것이 군신의 뜻입니다. 신의 혼자 생각이 아닙니다. 신에게 사사로운 뜻이 있더라도 삼가 두려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얼굴을 뵙는 날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내가 말했다고 전하여라.” >라고 말했다. 이에 대부들은 대신의 말을 듣고 반구궁으로 갔다. 그리고 삼국왕과 앵정신에게 대신의 말을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에게 전하게 했다. 그때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은 여러 대부들에게 >“천황의 유언은 어떠한 것인가?” >라고 물었다. (대부들은) >“신들은 깊은 것은 모릅니다. 오직 대신의 말에 따르면, 천황이 병석에 누워있던 날 타무라 황자에게 ‘경솔하게 장래의 국정을 말하지 말라. 이제부터는 그대 타무라 황자는 신중하게 말하고, 태만해서는 안된다.’라고 명을 내리고, 다음에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에게는 ‘그대는 아직 어리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 반드시 군신의 말에 따르라.’라고 명했습니다. 이것은 가깝게 모시고 있었던 여러 여왕 및 궁녀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또한 대왕이 분명히 알고 계시는 바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또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은 >“이 유언은 도대체 누가 들었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것은 기밀이기 때문에 신들은 모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윽고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이) 다시 대부들에게 >“친애하는 숙부가 마음을 써서 사자 한 사람만 보내지 않고 중신들을 보내 깨우쳐 주셨다. 이것은 큰 은혜다. 그런데 지금 군경이 말하는 천황의 유언은 내가 들은 것과 조금 다르다. 나는 천황이 와병 중이라는 것을 듣고 달려가 궁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중신련미기가 궁 안에서 나와 ‘천황이 부르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아가 내전으로 향했다. 율외채녀흑녀가 뜰에서 맞이하여 대전으로 안내했다. 들어가 보니 근시인 율하녀왕을 위시하여 궁녀, 유녀 8인 등 모두 수십 인이 천황 옆에 있었다. 또 타무라 황자도 있었다. 천황은 병이 위중하셔서 나를 보지 못하셨다. 그래서 율하녀왕이 ‘부르신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이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천황이 몸을 일으켜 ‘짐은 덕이 없는 몸으로서 오랫동안 대업을 맡아왔다. 지금 명운이 다하여 병을 피할 수는 없다. 그대는 본래 짐의 심복이다. 총애하는 마음은 비할 데가 없다. 황위의 계승은 짐의 세대에 한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에 충실하여라. 그대는 어리더라도 삼가 말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일은 당시에 거기에 있던 측근들이 모두 알고 있다. 나는 이 대은을 입어 두렵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국가의 통치는 중대한 일이고, 나는 어리고 현명하지 못한데 어찌하여 대임을 맡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여 숙부 및 군경들에게 상의하려고 했다. 그러나 말할 기회가 없어서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이전에 숙부의 병문안을 하려고 왕경에 가서 풍포사에 묵은 적이 있다. 이 날 천황께서는 팔구채녀유녀를 보내 ‘너의 숙부인 대신은 항상 너를 걱정하며 언젠가는 반드시 황위가 그대에게 갈 것이 아닌가! 라고 말했다. 그러니 삼가고 자중하라’고 명하셨다. 전에 틀림없이 이러한 일이 있었다.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내가 어찌 천하를 탐하겠는가. 오직 들은 것을 밝히는 것뿐이다. 천신지기가 함께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천황의 유칙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대신이 보낸 여러 경들은 원래 신성한 창의 가운데를 잡는 것처럼 공정하게 주상하는 사람들이니 숙부에게 잘 말씀하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가노 에미시는 회의에 따라, 군신의 의견은 타무라 황자의 옹립으로 통일되었으며, 이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스이코 덴노의 뜻이었음을 강조했다. 반대로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는 자신이 유조를 들었을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자신은 대왕(오오키미)위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유언의 올바른 뜻을 알고 싶다고 전했으나, >야마시로노오오에는 삼국왕과 앵정신을 군경과 함께 대신에게 보내서 >“대답을 듣고 싶다.” >고 말하도록 시켰다. 그러자 대신은 기신과 대반련을 보내 삼국왕과 앵정신에게 >“전일에 이미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신은 감히 어느 왕을 가볍게 여기고 어느 왕을 중하게 여기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며칠 후에 야마시로노오오에는 또 앵정신을 보내 대신에게 >“전일의 일은 내가 들은대로 말했을 뿐이다. 오히려 숙부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겠는가?” >라고 말했다. 이 날 대신은 병이 나서 직접 앵정신을 만나 말을 할 수 없었다. 다음날 대신은 앵정신을 불러, 안배신·중신련·하변신·소간전신·대반련을 보내어 야마시로노오오에에게 >“흠명(긴메이) 천황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군경은 모두 다 총명합니다. 오직 신만이 현명하지 못하지만, 때마침 인물이 없는 때를 만나서 어긋나게 군신의 윗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황위를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중대합니다. 전언하여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노신이 힘들어도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유칙을 거스르지 말자는 것으로, 신의 사사로운 생각이 아닙니다.” >라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소가노 에미시는 계속 스이코 덴노의 뜻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직접 말하기를 꺼리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야마시로노오오에는 자기는 그저 들은대로 말했을 뿐이라면서 [[데꿀멍|어찌 숙부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냐며 태도를 유보했다]]. 이 시기에 야마시로노오오에가 황위 계승을 포기함에 따라 실질적으로 타무라 황자의 황위 계승이 기정사실이 된 것이다. 그런데 타무라 황자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의 지지자였던 사카이베노 오미 마리세가 소가노 에미시에게 반기를 들었다. 마리세는 전대 대신인 [[소가노 우마코]]의 동생으로 소가노 에미시의 숙부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스이코 덴노 20년에 기타시히메[* 29대 [[긴메이 덴노]]의 비로 31대 [[요메이 덴노]], 33대 [[스이코 덴노]]의 어머니였으며, 소가노 우마코와 사카이베노 오미의 남매였다.]를 긴메이 덴노의 능에 합장하는 행사에서 "씨성의 본"[* 쉽게 말하면, 당시 대왕권의 중앙부에 위치하던 여러 씨족들의 연원에 대한 내용이다.]을 읊는 제관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의 일족으로 추정되는 대덕 사카이베노 오미 오마로의 존재로 볼 때, 스이코 조에서는 소가노 우마코 다음가는 중신이자 실력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신회의에 앞서 소가노 에미시는 숙부인 마리세를 찾아가 누구를 후계자로 세울 것인지를 물었는데, 이는 그가 소가씨 내부에서 장로격인 존재로 인식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에 앞서 대신이 홀로 경부마리세신에게 >“지금 천황이 붕어하시고, 후계자가 없다. 누구를 천황으로 세워야 하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야마시로노오오에(山背大兄)를 천황으로 하십시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결국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의 황위 계승이 좌절되자 마리세는 형 소가노 우마코의 묘소를 조영하던 소가씨의 막사를 파괴하는 등, 대대적으로 깽판을 친 뒤에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의 이복형제인 하츠세베나카츠 왕의 궁으로 숨었다. >이미 대신은 안배신·중신련을 통하여 다시 한 번 경부신에게 >“어느 왕을 천황으로 할 것인가?” >라고 물었다. 이에 경부신은 >“일전에 대신이 친히 물으셨을 때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새삼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크게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갔다. 이때 소아씨의 일족이 모두 모여서 도대신을 위해 묘를 만들려고 묘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때 마리세신은 묘소의 막사를 부수고, 소아의 전가로 물러가서 출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은 분노하여 신협군승우와 금직수적저를 보내 >“지금 나는 그대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친족의 의리로서 해칠 수는 없다. 다만 타인이 그르고 네가 옳다고 하면, 나는 반드시 타인에 거슬러도 너를 따르겠다. 만일 타인이 옳다고 하고 네가 그르다고 하면, 나는 당연히 너를 등지고 타인을 따를 것이다. 이 때문에 네가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너와 틀어질 것이다. 나라도 어지러워질 것이다. 그러면 후세 사람들이 우리 둘이 나라 일을 망쳤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후대의 오명이 될 것이다. 너는 삼가 반역을 일으키지 말라.” >고 말했다. 그러나 따르지 않고 마침내 반구로 가서 박뢰왕의 궁에서 머물렀다. 대신은 더욱 노하여 군경을 보내 야마시로노오오에에게 >“요새 마리세가 저를 배반하여 박뢰왕의 궁에 숨어 있습니다. 마리세를 내보내 주시면 그 이유를 추문코자 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이 >“마리세는 원래 성황이 좋아하셨다. 지금 잠시 와 있을 뿐이다. 어찌 숙부의 마음과 다를 것인가. 허물하지 말길 바란다.” >고 말했다. 그리고 마리세에게 >“그대가 선왕의 은혜를 잊지 않고 온 것은 몹시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대 하나 때문에 천하가 어지러울 것이다. 또 선왕이 임종하실 때 여러 아들에게 ‘나쁜 짓을 하지 말라. 좋은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을 받들어 길이 훈계로 삼고 있다. 그래서 사사로운 정이 있어도 참고 원망하지 않는다. 또 나는 숙부를 배반할 수 없다. 바라건대 앞으로는 꺼리지 말고 여러 경들의 의견을 따라 거역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고 말했다. 이때 대부들은 마리세에게 >“야마시로노오오에 왕의 말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고 말했다. 그래서 마리세신은 의지할 바가 없어졌다. 이에 울면서 집에 돌아와 지낸 지 10여 일이 되던 날, 박뢰왕이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이에 마리세신이 >“나는 살아 있기는 하지만 의지할 사람이 없다.” >라고 말했다. 대신은 경부신을 죽이려고 군사를 일으켜 보냈다. 경부신은 군사들이 왔다는 것을 듣고, 차남 아야를 데리고 문을 나가 걸상에 앉아서 기다렸다. 곧 군사들이 와서 내목물부이구비에게 목 졸라 죽이도록 했다. 그리하여 부자가 함께 죽었다. 이들을 같은 장소에 묻었다. 다만 장남인 모진만은 니사의 기와집으로 도망가서 숨었다. 그는 거기서 비구승 한 두 명을 범했는데, 비구승 한 명이 질투하여 그 사실이 밝혀졌다. 절을 포위하여 붙잡으려고 했으나, 도망하여 무방산에 들어갔다. 그래서 산을 수색했다. 모진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 결국 그는 목을 찔러 산중에서 죽었다. 사람들이 노래했다. >"무방산은 들어선 나무가 적어도 거기에 의지하려고, 모진이라는 젊은 분은 여기에 숨어 있었던가." 당시에는 한 씨족의 대표자가 죽었을 때, 일족 전체가 모여서 묘소를 조영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묘소 조영 뿐만이 아니라 차기 대표자의 족장권과 정치적 우위를 대대적으로 공인받는 관습이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마리세의 자충수가 되었는데, 형 소가노 우마코의 묘소를 조영하기 위해 모인 일족들을 공격했기 때문에 '''소가씨 전체의 [[어그로]]를 끌어버린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소가씨 전체에서 소가노 에미시의 족장권 승계를 공인했다는 얘기가 되므로 마리세는 결국 [[죽 쒀서 개 준 꼴|에미시 좋은 일만 한 셈]]이 되었다. 숙부가 자기 아버지의 묘소를 공격했다는 사실에 분개한 소가노 에미시는 마리세에게 사자를 보내 >'''"당신 때문에 우리가 후세에 역적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냐? 지금이라도 당신 말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면 살려주겠다."''' 라고 했지만 결국 이걸 거부하고 하츠세베나카츠 왕의 궁궐에 숨은 것이었다. 이에 소가노 에미시는 이 사태를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에게 고했고, 야마시로노오오에 황자는 마리세에게 >'''"그대는 우리 아버지가 총애하던 신하였고, 그 뜻에 따라준 것은 고맙다. 근데 지금 그대 때문에 천하가 어지러워질 수도 있다. 그리고 난 숙부를 배반할 수 없다. 부탁하는데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따라라."''' 라고 말했다. 마리세는 조정 내에서 완전히 고립된데 더해 [[뒷통수|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 되었고, 결국에는 10여 일 후에 하츠세베나카츠 왕이 병으로 급사함과 동시에 조카인 소가노 에미시가 보낸 군대의 손에 두 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629년 음력 1월 4일, 소가노 에미시를 중심으로 한 군신들은 타무라 황자에게 신새를 바치고 황위에 오를 것을 종용했다. 타무라 황자는 고사했으나 결국에는 군신의 뜻을 받아들여 즉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